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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 오어 낫 (웨딩드레스, 파이널걸, 블랙코미디)

레디 오어 낫

솔직히 고백하면, 저는 이 영화를 처음에 완전히 얕봤습니다. 제목도 그렇고 포스터도 그렇고, 그냥 웨딩드레스 입은 여자가 쫓기는 뻔한 하우스 호러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친구들이랑 자취방에서 야식 시켜놓고 귤 까먹으면서 틀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다들 "이거 그냥 킬링타임용 아니었잖아" 했습니다. 결혼식 당일 밤, 시댁 식구들이 신부를 제물로 바치려 한다는 설정 하나로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수 있다는 게 아직도 신기합니다.


웨딩드레스가 찢기는 순간, 이 영화가 달라집니다

영화를 처음 틀면 꽤 우아한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하얀 레이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 그레이스, 고풍스러운 대저택, 품위 있어 보이는 시댁 가족들. 그런데 이 모든 게 복선이었다는 걸, 숨바꼭질 카드 한 장이 나오는 순간 깨닫게 됩니다. 혹시 이 설정을 처음 듣고 "말이 되는 이야기야?" 싶으셨나요?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 황당함을 무기로 씁니다.

연출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미장센(mise-en-scène)'의 활용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우의 위치, 조명, 의상, 소품까지 포함하는 영화적 구성 언어를 뜻합니다. 이 영화에서 그레이스의 웨딩드레스는 단순한 의상이 아닙니다. 오프닝에서는 그녀를 압박하는 가부장적 전통의 상징처럼 보이고, 밑단을 거칠게 찢어내는 순간부터는 그 억압에서 벗어나는 각성의 순간으로 읽힙니다. 제가 친구들이랑 보다가 그 장면에서 팝콘 먹던 손이 멈췄던 게 기억납니다. 분위기가 딱 바뀌는 게 느껴졌거든요.

하이힐을 벗고 노란 컨버스를 신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노란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매는 동작 하나가, 이후 그레이스가 어떤 인물로 변해갈지를 말없이 다 보여줍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드레스는 흙과 피로 물들어가는데, 감독이 의상을 내러티브의 일부로 쓰는 방식이 영리하다고 느꼈습니다. 이런 시각적 성장 서사를 95분 안에 이렇게 깔끔하게 담아낸 영화를 최근에 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파이널 걸의 새로운 얼굴, 사마라 위빙

호러 영화에 '파이널 걸(Final Girl)'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파이널 걸이란 슬래셔 장르에서 살인마의 공격을 끝까지 살아남는 여성 주인공을 뜻하는 용어로, 1970~80년대 클래식 호러 영화에서 공식처럼 자리 잡은 클리셰입니다. 문제는 이 클리셰가 너무 오래된 공식이라는 겁니다. 대부분 겁에 질려 울면서 도망 다니다가 운 좋게 살아남는 수동적인 캐릭터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레이스는 다릅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겁먹고 숨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당한 만큼 갚아줍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 바로 이겁니다. 고구마 구간이 단 1초도 없어요. 시댁 식구들한테 죽을 뻔하고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도 그레이스는 질질 짜지 않습니다. 욕을 퍼붓고, 이를 악물고, 결국 버텨냅니다. 저도 모르게 주먹 꽉 쥐면서 응원하게 되더라고요.

이 역할을 연기한 사마라 위빙(Samara Weaving)은 이 영화로 저한테 완전히 각인된 배우입니다. 공포에 질렸다가 분노로 끓어오르는 표정 변화, 특히 그 크고 또렷한 눈빛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대체 불가능합니다. 후반부에 악에 받쳐서 소리 지를 때 그 눈빛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호러 영화에서 주연 배우 한 명이 이렇게까지 전체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이 영화는 그 케이스입니다.

참고로 슬래셔(Slasher)란 살인마가 등장인물들을 차례로 제거해 나가는 호러 장르의 하위 분류를 뜻합니다. 1980년대 할리우드에서 크게 유행했고, <레디 오어 낫>은 이 공식을 현대적으로 비틀어 씁니다. 당하는 쪽이 아니라 버티고 반격하는 쪽에 카메라가 완전히 밀착된다는 점에서요.


블랙 코미디가 무기인 영화, 웃으면서 무섭습니다

이 영화가 단순한 공포 영화와 달리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블랙 코미디(Black Comedy)의 층위가 아주 촘촘하다는 겁니다. 블랙 코미디란 죽음, 폭력, 도덕적 타락처럼 무겁고 불쾌한 소재를 역설적으로 유머의 재료로 삼는 장르적 기법을 뜻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잔혹한 서바이벌극인데, 실상은 아주 높은 수위의 풍자극입니다.

시댁 식구들을 한번 보세요. 웅장한 고딕풍 대저택에서 쇠뇌와 사냥총을 들고 나타나는데, 실제로는 한없이 찌질합니다. 석궁 조작법을 몰라서 유튜브 튜토리얼을 검색해 보는 장면에서는 진짜 웃음이 터졌습니다. 홧김에 엉뚱한 하녀를 쏴 죽이는 사고도 있고요. 이 사람들이 대대로 막대한 부를 축적해온 상류층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능하게 묘사됩니다.

감독이 이를 통해 말하려는 게 뭔지는 꽤 명확합니다. 르 도마스 가문이 그레이스를 죽이려는 이유는 악마와의 계약으로 대대손손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들의 물질적 안위를 위해 갓 가족이 된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내치는 이 집안이, 실은 현대 자본주의 최상위 계층의 풍자적 초상화라는 해석이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영화가 끝난 후 친구들이랑 그 이야기를 한참 했는데, 단순 킬링타임용 영화라고 하기엔 씹을 거리가 꽤 많았습니다.

호러와 코미디의 톤 전환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처리하는 영화는 많지 않습니다.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가 황당한 슬랩스틱으로 힘을 빼고, 다시 공포로 끌어올리는 리듬이 95분 내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이런 균형감은 연출자의 실력입니다.


이 영화, 누구에게 권하고 누구에게는 말려야 할까요

제가 보기에 이 영화의 장단점은 꽤 뚜렷합니다. 먼저 좋았던 부분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서사가 질질 끌리지 않습니다. 95분 안에 설정, 갈등, 반전, 결말까지 군더더기 없이 담겨 있습니다.
  2. 여주인공이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당하면 갚아줍니다. 이게 보는 내내 카타르시스로 이어집니다.
  3. 공포와 코미디의 톤 밸런스가 아주 잘 잡혀 있습니다. 무서우면서도 웃깁니다.
  4. 마지막 엔딩 시퀀스의 비주얼이 압도적입니다. 대저택이 박살나는 장면을 보고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단점도 있습니다. 고어(gore), 즉 신체 훼손이나 과격한 유혈 묘사가 꽤 자주 나옵니다. 고어란 영화에서 신체 상해 장면을 사실적이고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기법으로, 비위가 약하신 분들에게는 눈을 감아야 할 장면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저도 몇 군데는 좀 과하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엔딩의 초자연적 연출은 호불호가 갈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는 그 결말이 오히려 영화의 정체성을 확실히 해준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적인 스릴러를 기대했던 분들에게는 당황스러울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미리 알고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호러 영화의 장르적 특성이나 슬래셔 영화의 역사적 계보가 궁금하신 분들은 영화진흥위원회(KOFIC)에서 관련 장르 연구 자료를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사마라 위빙의 필모그래피와 이 작품의 제작 배경에 관한 정보는 IMDb 레디 오어 낫 공식 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5점 만점에 4.4점을 줬습니다. 호러 장르 입문자에게도 무리 없이 추천할 수 있고, 장르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파이널 걸 공식을 얼마나 영리하게 비틀었는지 확인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야식 시켜놓고 친구들이랑 틀기 딱 좋은 영화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끝난 후 의외로 할 이야기가 많이 생깁니다. 


참고 : https://blog.naver.com/achromatic_lake/224345340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