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 영화가 지겹다고 느낀 적 있으신가요? 저는 솔직히 있습니다. 그런데 <슈퍼걸: 우먼 오브 투모로우>를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붉은 태양 아래 먼지 날리는 행성에서 맥주를 들이켜는 슈퍼걸의 첫 장면, 그 한 컷이 저를 다시 히어로 영화 앞에 앉게 만들었습니다.
밀리 알콕, 슈퍼걸을 다시 쓰다
드라마 <하우스 오브 드래곤>에서 어린 라에니라 역으로 이름을 알린 밀리 알콕이 카라 조-엘을 연기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슈퍼걸 하면 떠오르는 밝고 건강한 이미지와 그녀의 반항적인 인상이 영 어울리지 않아 보였거든요. 그런데 직접 보고 나니 그 의심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녀가 선보이는 카라는 전형적인 슈퍼히어로가 아닙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차가운 눈빛을 던지고, 담배를 물고 낯선 행성 골목을 걸어가는 모습은 기존 슈퍼걸의 문법을 완전히 해체합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란 인물이 이야기를 통해 변화하는 내면의 궤적을 뜻하는데, 이 영화에서 카라의 캐릭터 아크는 지금껏 히어로 영화에서 보기 어려웠던 방식으로 그려집니다. 화려한 액션으로 성장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눈빛 하나, 침묵 하나로 내면의 균열과 봉합을 표현합니다.
제가 특히 압도당한 건 후반부 장면이었습니다. 온몸에 상처를 입은 카라가 어린 루시를 뒤에 두고 앞으로 걸어 나가는 그 순간, 대사 한 마디 없이도 "내가 너의 내일이 되어줄게"라는 감정이 스크린을 가득 채웠습니다. 옆에 앉은 분이 조용히 휴지를 꺼내시는 걸 보면서, 저도 코끝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습니다. 배우 한 명이 영화의 무게를 이만큼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코스믹 로드무비가 펼쳐내는 우주의 질감
이 영화는 장르적으로 코스믹 로드무비(Cosmic Road Movie)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코스믹 로드무비란 우주라는 광활한 배경 위에서 두 인물이 함께 이동하며 서로의 내면을 마주하는 서사 형식을 말합니다. 카라와 루시, 그리고 우주견 크립토가 함께 은하를 가로지르는 이 여정은 사실 외부의 악당을 쫓는 여정이 아니라, 두 사람이 각자의 상실과 분노를 직면하는 내면의 여정에 가깝습니다.
시각적으로는 아이스너상(Eisner Award) 수상 원작 그래픽 노블의 화풍을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온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이스너상이란 만화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흔히 '만화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립니다. 원작 일러스트레이터 빌키스 에블리가 구사하는 파스텔 톤의 몽환적인 우주 풍경이 실사 영화로 이렇게까지 구현될 수 있다는 사실이, 영화를 보는 내내 믿기지 않았습니다. CG에만 의존한 차가운 화면이 아니라, 마치 두껍게 물감을 쌓아 올린 유화처럼 유기적인 질감이 스크린에서 느껴졌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 영화는 큰 화면에서 봐야 진가가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황량한 사막 행성의 붉은 먼지가 날리는 풍경부터 신비로운 빛깔로 가득 찬 미지의 성운까지, 각 장면이 하나의 우주 회화처럼 구성되어 있어서 넋을 잃고 보게 됩니다. 그 아름다움을 작은 화면으로 보는 건 어딘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운드트랙 역시 인상적이었는데, 웅장하면서도 쓸쓸한 현악기 편성이 코스믹 로드무비 특유의 고독한 서정성을 배가시킵니다. 히어로 영화 특유의 박진감 넘치는 오케스트라 대신, 광활한 우주를 혼자 걷는 듯한 현악기의 울림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 남았습니다.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바라본 서사의 힘
이 영화가 기존 히어로물과 가장 크게 다른 지점은 트라우마(Trauma)를 서사의 장식이 아닌 핵심 동력으로 삼는다는 점입니다. 트라우마란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적 경험이 심리에 깊은 상처로 남아 이후의 행동과 감정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상태를 뜻합니다. 슈퍼맨의 사촌 동생이라는 설정이 이 영화에서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카라의 트라우마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가 됩니다.
클락 켄트는 따뜻한 지구 가정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반면 카라는 크립톤 행성이 파괴되는 과정에서 죽음과 고통을 매일 목격하며 성장했습니다. 같은 비극적 사건을 공유하면서도, 두 사람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히어로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화는 이 대비를 설교하듯 설명하지 않습니다. 카라의 냉소와 무기력함 속에 그 모든 이야기가 이미 새겨져 있습니다.
루시와의 관계도 같은 맥락입니다. 아버지를 잃고 복수를 꿈꾸는 루시의 분노 뒤에서, 카라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봅니다. 이 서사 구조는 감독 크레이그 길레스피가 <아이, 토냐>, <크루엘라> 등에서 꾸준히 탐구해온 '상처받은 아웃사이더'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감독이 이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 얼마나 섬세한지는, 복수와 정의의 경계를 질문하는 영화의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피로 얼룩진 복수가 과연 정의인가, 아니면 고통의 연장인가. 이 질문을 영화는 끝까지 단정 짓지 않습니다.
원작 그래픽 노블을 쓴 톰 킹(Tom King)은 DC 코믹스 역사상 가장 심리적으로 깊이 있는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서사 방식에 대해서는 DC Comics 공식 사이트에서도 원작 시리즈와 함께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원작이 가진 내밀한 심리 묘사를 영화가 얼마나 충실하게 옮겨왔는지, 코믹스를 먼저 읽어본 분들이라면 더욱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알면 좋은 것들
이 작품은 제임스 건(James Gunn)이 진두지휘하는 새 DC 유니버스, 이른바 DCU(DC Universe)의 '챕터 1: 신들과 괴물들' 라인업의 핵심 타이틀입니다. DCU란 DC 코믹스 원작 기반의 영화와 드라마를 하나의 일관된 세계관으로 연결하는 프랜차이즈를 뜻합니다. 기존 DCEU(확장 DC 유니버스)와 달리, 이번 리부트는 개별 작품의 완성도 자체에 집중하겠다는 방향성을 보여주는데, <슈퍼걸: 우먼 오브 투모로우>는 그 의도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단독 히어로 영화가 이 정도의 완성도를 가질 수 있다는 게요. 관람 전에 미리 알아두면 더 풍성하게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들을 정리해 봤습니다.
- 원작 그래픽 노블 <슈퍼걸: 우먼 오브 투모로우> (톰 킹 글, 빌키스 에블리 그림)을 미리 읽어두면 시각적 연출이 얼마나 원작에 충실한지 비교하며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 슈퍼맨과의 대비가 이 영화의 정서적 출발점이므로, 카라와 클락의 관계 설정을 가볍게 숙지하고 가면 도입부 이해가 훨씬 빠릅니다.
- 액션 블록버스터 기준으로 보러 가시면 중반부가 느리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코스믹 로드무비라는 장르 특성 자체가 정적인 감정 빌드업 위주이므로, 그 흐름을 따라갈 준비를 하고 입장하시길 권합니다.
- 가능하다면 아이맥스(IMAX) 또는 대형 스크린 관람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이 영화의 비주얼은 화면 크기에 따라 감동의 크기가 달라집니다.
히어로 영화에서 아이맥스(IMAX) 상영의 시각적 효과에 대해서는 IMAX 공식 사이트에서도 관련 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 영화는 우주 풍경의 색감과 스케일이 핵심이라 대형 포맷 관람 여부가 전체 감상 경험을 좌우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밤하늘을 보며 집에 걸어오는데, 저 멀리 반짝이는 별 어딘가에 카라와 루시가 정말로 은하수를 헤치며 걷고 있을 것만 같은 묘한 여운이 오래 남았습니다.
